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소설 『모모』에는 회색 신사라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시간을 자기네 시간저축은행 저금하라고 꼬드기는 그들은 친구들과 노는 것도, 가족과 대화 나누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을 상상하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말합니다. 여유로운 미래를 위해 사람들은 시간을 저금하기 시작합니다. 여유는 사라지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점점 더 가족과 이웃을 돌보지 않는 마을은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갑니다.
[2024 서울공예문화축제에 참가한 M(멋)Z(진)세대 사원 P군]
유난히 더웠던 6월, 두 주간에 걸쳐 주말 이틀, 총 사흘간 서울공예문화축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첫날 아침부터 새내기 MZ세대 사원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부스 오픈을 준비합니다. 이윽고 관람객 맞이하려 부스에 선 젊은이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나무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던 십 수년 전 목재 회사 초년병 시절이 떠오릅니다. 관람객들이 하나둘 모여듭니다.
오후로 접어들자 젊은 직원들 얼굴에 슬슬 웃음기가 돕니다.
"가지고 계신 폰으로 QR코드 찍어보시라고만 말씀드렸는데 다들 재미있어하시네요."
[부스 앞 설치한 배너 출력물에 프린팅 QR코드]
부스 안에 걸린 현수막과 홍보물에는 QR코드가 붙어있습니다. 어떤 QR코드를 찍으면 공장장의 '우드가이버' 유튜브 채널이 뜨고, 또 다른 QR코드는 '목재밥 30년 먹은 언니'라는 영업팀장의 블로그 글로 연결됩니다. 야외용 테이블 위에 놓인 관리부 대리의 명함에는 '김대리의 재직증명서' 블로그 주소가 나와 있습니다.
온종일 축구장 한 개 반 넓이의 공장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그들은 틈나는 대로 업무를 글로 적고, 나무 이야기를 쓰고, 목제품 생산 과정을 영상에 담습니다. 흘러온 시간 속 '수많았던 그들'은 그렇게 콘텐츠가 되어 각자의 SNS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이 콘텐츠들 하나하나가 그들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온라인 아바타(분신)인 셈이죠.
[유림목재&데일리포레스트 부스에서 '목재 무게를 맞춰라' 게임을 즐기는 관람객]
전시 마지막 날 아침부터 땡볕이 전시장 마당에 내리쬡니다. 찡그린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부스를 지나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QR코드를 찍어봅니다. QR코드로 소환된 게시글과 동영상은 사람들의 폰 안에서 자기 안에 담긴 스토리를 풀어냅니다. 엄마폰으로 원목 제재하는 동영상을 보던 아이 눈이 점점 커집니다.
'그래. 네 나이에 세네 아름이 넘는 원목 켜는 모습을 어디서 봤겠니.'
코끝에 걸친 안경 너머로 폰을 보던 중년의 남성은 테이블에 놓인 영업팀장 명함을 챙깁니다. 주머니 속에서 카카오톡 알람이 울립니다. 공장장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방금 전에 700명을 넘었다는 메세지입니다.
[부빙가(Guibourtia spp.) 나무로 만든 우드큐브]
1988년 대한민국이 88서울올림픽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던 그 해, 미국 복사기 제조회사인 제록스에서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비쿼터스는 라틴어로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연구팀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컴퓨터를 나눠 쓰는 시대가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거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났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여태 쌓은 과거를 오늘 들른 관람객들의 스마트폰에 띄우고 '좋아요'를 받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앞으로 또 누군가를 만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오늘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