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폐허가 된 일본은 1950년대 한국전쟁의 특수를 발판으로 초고속으로 성장합니다. 지금은 설마 하는 분들도 분명 많겠지만 1988년 당시 시가총액 세계 50위권 기업들 중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었습니다. 당시 전체 1위를 기록한 일본 회사 NTT(일본전신전화공사)의 시총을 국가별 GDP(국내총생산) 순위로 따져봐도 호주보다 한 단계 위인 15위였으니 일본이라는 나라의 경제 규모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을 축적한 일본 기업들의 제품은 점차 세계 시장을 장악했고 1980년대 들어 일본 경제는 풍요로운 황금기를 맞습니다. 동시에 그간 천정부지로 치솟은 일본의 부동산 가격이 정점에 달했던 1980년대 말에는 도쿄에 위치한 일본 황궁 인근 땅값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전체 땅값을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 엄청난 무역 흑자와 저금리 대출로 시중에 풀린 돈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대거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던 미국이 심각한 대일 무역 적자를 참지 못하고 엔화 가치를 올리는 '플라자 합의'를 끌어내면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일본은 수출이 줄어들며 경제 성장에 제동이 걸립니다. 이에 놀란 일본 정부는 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 완화라는 경기 부양책을 꺼내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일본 경제에 거품을 키우는 계기가 됩니다.
가계와 기업들은 가진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열풍이 지속되며 시중에 풀린 대부분의 돈은 미래를 위한 설비투자나 연구개발 분야가 아니라 자본생산성이 가장 낮은 부동산 시장에 쏠렸습니다. 사람들의 기대 심리가 만들어낸 '부동산 불패' 신화는 1989년 일본 정부가 부동산 거품의 위험을 지적하며 금리를 올리고 대출 총량규제 등 각종 부동산 규제책을 쏟아내자 허무하게 무너져내렸습니다. 대출이 어렵자 부동산 거래는 끊겼고, 빚을 상환하지 못한 차입자의 건물이 헐값에 부동산 시장으로 쏟아졌습니다.
1992년 약 12조 8천억 엔 규모였던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2001년에는 42조 엔까지 늘면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마비되기에 이릅니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가계와 기업의 부채 상환 능력은 줄었는데, 은행들은 도산을 피하려 지속적으로 대출금 회수에 나서는 악순환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은 수십 곳의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1500조 엔에 이르는 자산(한화 약 1경 650000조 원)이 증발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초장기 경기 침체에 빠져들게 됩니다.
"전 국민 투자자랑 대회를 시작합니다. 빰 빰빰 빰빰 빰빰~ 빠라밤 빠라밤"
지난 11일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이 한국의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이라고 경고한 내용을 분석한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흘러나온 멘트입니다. '전국노래자랑' 오프닝을 패러디한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걱정이 앞섭니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수준이길래 국제금융기구가 한국을 콕 집어 경고를 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네이버 검색창에 '가계대출'만 입력해도 '폭증', '과열', '광풍' 등 우려스러운 제목의 기사들이 화면을 도배할 정도입니다.
과거 1970~80년대 활기를 띠던 경기가 1990년 갑자기 침제에 빠진 일본이 처한 상황을 두고 경제 전문가들은 '경착륙' 했다고 말합니다. 잘 날던 비행기가 문제가 생겨 빠르게 고도를 낮춰 급박하게 땅에 내려서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반대로 대외 여건이 크게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정책을 적절히 취해 과열된 경기가 서서히 안정화되는 것을 '연착륙'이라고 합니다.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바쁜 출근길 아침에 타이어 공기가 다 빠진 자동차 때문에 당황했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얼마 후 출동한 기사님이 타이어에서 뽑아낸 쇠붙이를 보고 있자면 짜증도 몰려옵니다. 그럴 때는 일부러 도로 위에 널부러져 굴러다니던 찢어진 타이어 조각들을 본 기억을 떠올립니다. 달리다가 타이어가 터져 버린 그 차는 아마도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구멍 하나 때운 걸로 끝났으니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잊는거죠.
주식은 잘 몰라서 사놓은 게 없으니 주가 오르내리는데 신경 쓸 일은 없어 다행입니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빚낼 자신이 없어 사둔 집도 없으니 부동산 가격 등락에 마음 졸일 일도 없으니 다행입니다.
다만 우리나라 경제가 '우당탕탕'하며 경착륙하거나, 과열된 부동산 경기가 '펑'하고 터지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국가 경제라는 타이어에 구멍 몇 개 때우는 정도로 끝나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바랄 게 있다면 '빚투'에 눈 돌리지 않고 맡은 일에 '영끌'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