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은 1년 중 무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삼복(三伏) 가운데 마지막 날인 말복이었습니다. 삼복(三伏)의 '伏(엎드릴 복)'은 복날 무더위가 너무 심해 지친 나머지 엎드려 누워있는 사람을 묘사한 글자라고 해요. 복 앞에 '三(석 삼)'은 가을의 기운이 여름의 더운 기운에 세 번 굴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말복 오후'를 쓴 손석철 시인은 '여름과 가을이 배 맞대고 마지막 한 판 뒤집기 위해 깊은숨 몰아쉬며 씩씩대는 날'이라는 시구로 묘사하기도 했어요.
사춘기인 아이는 요새 뭘 하든 좀처럼 엄마, 아빠와 함께하려 들지 않습니다. 복날에 삼계탕 먹으러 가자 해도 아이는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겠다며 소파에 앉은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저번주 일요일은 실로 오랜만에 함께 영화관에 가겠다고 온 가족이 약속한 날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 다 되서 아이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그냥 집에 있겠다고 말합니다. 이내 아내 표정이 굳어진다. 이럴 때마다 아빠는 난감합니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려는 찰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아이가 신발을 신고 따라나섰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사진 = 티캐스트)]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공공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는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일상이 줄거리입니다. 혼자 사는 그는 새벽녘 이웃집 할머니의 빗질 소리에 잠을 깨고, 화분에 물을 주고, 청소부 유니폼을 입고, 자판기에서 커피 한 캔을 뽑아 들고 청소도구로 꽉 찬 경차에 올라타 출근을 합니다.
누가 감시하고 있지도 않은데 청소를 맡은 화장실들을 바쁘게 돌며 변기 구석구석을 광나게 닦습니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으로 향합니다. 간소한 안주와 함께 술을 딱 한 잔 들이킨 후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에 듭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사진 = 티캐스트)]
영화 전반 내내 며칠에 걸친 주인공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탓인지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털썩 고개를 떨굽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깜빡 졸았던 걸까요? 얼른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니, 얼굴과 눈동자에 스크린 불빛이 아른거립니다. 묘한 대견함이 느껴집니다. 친구들과의 스마트폰 게임을 뒤로하고 엄마 아빠와 함께해 준 까닭일까요? 괜스레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영화관을 나와 가족들에게 한 마디 건넵니다.
"우리 날씨도 더운데 저녁은 밖에서 맛있는 것 먹고 들어갈까?"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열대야의 나날 가운데 그날만큼은, '시원했던' 영화관과 '시원했던' 식당'에서 '좋았던' 기분이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올해 '복(伏) 날'은 다 지나갔지만, 기분 좋은 '복(福) 날',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퍼펙트 데이는 몇 번이나 더 만들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오늘은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니 이토록 끈질긴 찜통 더위도 곧 한풀 꺾이고, 여름도 결국은 지나가겠죠. 아들의 사춘기도, 아내의 갱년기도 지나갈 날이 머지 않았기를 바래봅니다. 나무를 좋아하고, 목재를 좋아하실 우드러버 여러분의 가을도 일일이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은 '퍼펙트 데이즈'로 예쁘게 물들어 가길 아울러 소망합니다.